2008년 08월 21일
윤웅렬-윤치호 父子의 이상한 친일 진입 시점.
글에서 흑룡회원 가운데 조선인으로 ‘윤치오’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는데,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와 EBS에 모두 등장하는 이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교과과정에는 근대적 의복을 다루는 파트에서 윤치오의 부인 윤고려의 사진이 실려 있습니다. 이 윤치오는 잘 알려진 인물인 윤치호의 사촌동생입니다.
제가 가진 궁금증은 바로 윤치호에 대한 것입니다. 그는 언제부터 친일의 길을 걸었을까.
윤치호는 17세 때 일본에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의 최연소 일원으로 파견되어 일본 유학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후 그는 귀국하여 서재필, 이상재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활동했습니다. 그는 분명 1907년 무렵까지만 해도 대한자강회나 신민회 등의 각종 민족 단체에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비록 신민회 같은 경우는 실질적으로 안창호의 주도로 이루어졌지만, 윤치호가 두 단체에서 모두 회장을 지낸 것을 보면 그의 위상이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안창호, 이동휘와 함께 연설을 하였는데 비교적 지지부진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윤치호의 부친 윤웅렬이 한일합방 직후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점을 떠올리며 윤치호가 곧바로 친일파가 되었는가 하는 점에 의문을 가졌습니다. 1907년 무렵까지도 민족 단체에 있던 사람이 1910년에 한일합방에 기여하며 작위를 받는 친일파가 되었다...? 마침 耿君님의 글을 보고 기억이 나서 윤치호에 대해 찾아보고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홈페이지의 윤웅렬 관련 자료를 읽어보았습니다.
읽어보고 의문을 약간 잘못 가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윤웅렬이 1911년 사망하면서 장자 윤치호가 남작 작위를 계승하였지만, 1911년 105인 사건으로 곧 작위를 박탈당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놓친 것이 있었으니, 윤치호는 일제강점기 후기에 친일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것을 알고 나니, 이번에는 다른 궁금증이 생깁니다.
근·현대사 교과서에 갑신정변의 실패를 예측한 대목(『윤치호 일기』 中)에서 처음 접한 이름, 윤웅렬(1840~1911).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홈페이지의 윤웅렬 관련 자료에 따르면, 그는 정부의 여러 직책도 맡았고 학교를 비롯한 단체들에 돈을 기부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1908년에는 기호흥학회의 특별평의회 회장으로 선임되기까지 하였으니, 거의 강점 직전까지 국가를 위하는 활동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1910년 한일합방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을 수작하다니...;;
아버지 윤웅렬은 이미 한일합방 무렵 친일파가 되었고, 아들 윤치호는 작위를 계승하고도 곧바로 박탈당하고 한참 지나서 친일파가 되었다...? 생애 말기에 갑자기 친일의 길로 접어든 윤웅렬도 궁금한 인물인데다가, 아직은 친일의 길로 가지 않았던 윤치호가 아버지를 어떻게 바라보았을지, 아버지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을지 참 궁금해지는 대목이더군요. 어쨌든 이들이 친일의 길에 가게 된 것은 한국사의 비극입니다만...
耿君님의 글에서 윤치호의 사촌 윤치오가 일본의 흑룡회라는 단체의 회원이었다는 내용도 이것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을 해봅니다.
# by | 2008/08/21 11:18 | 근·현대사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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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오의 경우 아무래도 갑신정변 때 일본으로 망명하여 유학하게 된 것이 계기인 듯 합니다.
구한말부터 윤치호는 민족운동계에서 명망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느 단체에서나 영입 1순위였고, 따라서 회장 직책을 많이 맡았고, 음으로 양으로 뒷수습 때문에 맘 고생을 많이 한 것으로 압니다. 물론 일본 총독부에서 끊임없이 회유를 하려고 했고, 그는 중도 노선을 견지한 것으로 압니다. 윤웅렬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친일이기 보다는 관망하다가 가문을 위해 남작 작위를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일제는 을사조약과 한일합방 당시 고관들에게 상당한 상금과 작위를 뿌렸는데, 그중 한 사람이 윤웅렬이고요. 주는 돈과 작위를 안 받아들인다면 자신 뿐 아니라 가문에 상당한 압박이 예상됐겠지요. 나중에 윤치호가 적극적 친일로 돌아선 배경도 자신 뿐 아니라 자기 가족, 친지, 그리고 감리교단과 YMCA의 주요 간부 등과 해당 단체의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였던 것으로 압니다.
가문의 생계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친일했다는 것으로써 그들을 옹호할 수는 없습니다. 어차피 당대 독립운동가들에게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던 것이 하나 있다면, "구한 말 대신의 직위에 있던 자들은 전부 매국노"라는 것이었습니다. 윤웅렬이 얼마나 대단한 고위직을 맡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가 정연진님의 말씀따라 '가문을 위해' 작위를 받았다면, 이미 그 자체로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특히 이 점에서 윤치호는 윤웅렬보다 더 비난받아 마땅하지요. 단지 국가 고위 관직 정도가 아니라, 한때 민족운동가였던 자(그것도 신민회 회장을 지내는 등 명망이 매우 높았던)가 적극적 친일로 돌아서는 모습(자신과 일족이 일제 당국에 위협받아서 단지 수동적으로만 친일했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당장 인터넷만 뒤져봐도 윤치호의 친일 행적이 다 드러납니다)에서 그는 이미 지워질 수 없는 친일파가 되었습니다.
지위가 있는 자일수록, 스스로 그 지위를 유지하려고 하나씩 무언가를 포기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변절입니다. 다른 것이 변절이 아니라.
왜 윤치호와 안창호가 다른 평가를 받는지 다시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이들의 인생사를 보고 교훈을 얻는 것이 역사입니다.
문제는 윤치호인데, 그는 당시 가장 정확하게 정세를 읽을 수 있었던 최고의 지식인이었습니다. 가장 잘 알기때문에 행동은 과격하거나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가장 큰 화두는 힘이었고, 강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은 그가 보기에 구제불능이요, 몇십 년 내에 독립을 회복하거나, 회복하더라도 지킬 힘이 없다고 봤습니다. 핵심은 국민들을 계몽시키고, 교육시켜 민도를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길 외에는 없다고 봤고, 무장독립운동은 희생만 키울뿐 헛된 일로 봤습니다. 정치인들간의 분열상도 그를 크게 실망시켰고요. 독립운동가, 민족운동가들도 기호파와 서북파간의 분열이 너무 심해 오히려 일제가 어부지리를 얻는 실정이었죠. 윤치호는 가운데서 참 어려웠을 겁니다. 여하튼 당시 사람들이 윤치호를 어떻게 봤느냐 인데, 여러 자료로 보건대 30년대까지는 그는 조선 최고의 지식인이요, 당대 명사이자, 원로였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이 그로 인해 직간접적으로 은혜를 입었고, 그는 묵묵히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 일을 했습니다. 최근에 알게 된 것은 그가 일제시대 내내 이승만 박사에게 활동비와 생활비를 보내어 도왔다는 겁니다. 그의 일가들도 때때로 임정이나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보냈다는군요. 겉으로는 일제에 협력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부를 독립운동가들에게 비밀리에 나누었다는 겁니다. 독립운동가들도 그들의 돈을 고맙게 받아 썼지 그들을 친일파라고 욕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일제말의 친일행위로 인해 해방후에 욕을 얻어먹었지만요. 가족들의 증언에 의하면 해방후 이승만 대통령이 나중에 윤치호의 아들을 불러 자신을 도와 준 일에 대해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꿈꿨던 우리 나라는 입헌군주제 하의 민주주의국가와 강한 경제를 가진 나라였지요. 그 모델은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이었고요.
일제시대의 이야기를 할때도 그때 내가 거기에 살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으로 들여다 봐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쉽지 않겠다는 판단이 될 겁니다.
우리가 아는 독립운동가들은 거의 다 해외로 망명해 목숨의 위협을 상당히 벗어난 상태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입니다. 일제시대 중기까지는 대략 그랬습니다.
국내에서는 사회운동이나 국민계몽운동, 교육운동 외에는 길이 없었고요, 그나마도 30년대 이후에는 불가능해졌고요. 윤치호의 경우 그의 운신의 폭은 좁았습니다.
그의 태도 여하에 따라 그의 가문은 물론 감리교단와 기독교계, YMCA, 그가 속한 비밀 애국단체들, 그리고 그가 간여한 학교들의 운명이 달려 있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다칠 수 있는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선택은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겁니다.
너무 많이 썼군요. 그럼 다음에 다시...
지금 이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윤치호의 '친일 행각'입니다. 당연히 한국 근대사에서 윤치호의 영향이 적지 않았고, 제가 그것을 부정할 생각이 없습니다. 따라서 저에게 그 말씀의 강조는 무의미합니다. 이광수 역시도 한때는 해외로 망명해서 임정에 참여하였던 독립운동가였지요. 그러나 지금 제가 초점을 두는 것은 그 이후, 이광수가 국내로 돌아가 서서히 일제에 타협해갔다는 겁니다. 만약 한때 한국사에서 중요한 영향을 준 것을 따지자면 이완용부터도 언급할 수 있습니다.
운신의 폭이 좁았다는 것을 강조하시는데, 그렇게 따진다면 국내의 모든 독립운동가들이 다 동일한 상황 하였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일각에서는 "국내 독립운동가들이 그 공간적 제약 때문에 대부분이 일제와 어느 정도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 모양입니다만, 그것도 개개인의 행적을 조사해보면 많은 정도의 차이를 보입니다. 고향에 은거하며 일제에 끝끝내 비타협으로 일관하다가 강압에 못이겨 아들이 학도병으로 마지못해 가게 되었던 조만식과, 여러 친일 단체에 몸담으며 적극 활동한 윤치호는 이미 비할 바가 아닙니다. 왜 윤치호가 해방 이후에 자살했는지, 그에 대해 자세히 알고 계시는 정연진님이라면 아시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