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다음 카페에서 역사 관련 문제로 토론하던 중 이런 주장을 접했다. 그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북한에서는 고구려 정통론을 내세우고 신라를 폄훼한다.
→ 남한에서 고구려를 부각시키고 신라를 폄훼하는 인식은 좌익에 의해서 확산되고 있다.
지난번 금성출판사 교과서의 좌편향 떡밥("금성출판사 교과서는 좌편향입nida 전교조가 골수 지지하잖아요" 포스팅 참조)과 매우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일단, 저 주장에서 첫 번째 내용, “북한에서는 고구려 정통론을 내세우고 신라를 폄훼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북한은 독재국가로서 그들 학계의 입장이 곧 공식 입장이기 때문에, 이것은 북한측 서적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주장이다. 필자 역시 이것에 이견은 없으며, 이를 비판하고자 포스팅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로부터 도출되는 후자의 내용(“남한에서 고구려를 부각시키고 신라를 폄훼하는 인식은 좌익에 의해서 확산되고 있다”)이다.
이 글을 보는 사람들, 아니 남한 사람들 전부에게 묻고 싶다. 정말 여기에 어떠한 논리적 상관관계가 성립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이미 비논리적 생각에 빠져 있다.
지난번 금성교과서의 좌편향 떡밥에서도 주장이 겹친다고 해서 그 주장을 그렇게 매도할 수는 없다는 것을 거론한 바 있다.
고구려를 강조하고 신라를 폄훼시키는 주장은, 역사를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에 의해서 시작된 주장인지 알 것이다. 바로 단재 신채호를 비롯한 근대 민족주의 사학자들이다. 아시다시피 이들은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신라를 당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여 불완전한 삼국통일을 이룩한 나라로 비판한 반면, 당과 맞서 싸운 고구려를 높이 평가했다. 그렇다면 이들의 주장이 북한과 같으니 민족주의 사학자들을 좌파라고 비판할 참인가? 북한도 없던 시절인 것을 생각하면 이는 우습지도 않은 얘기다.
비슷한 오류를 하나 들어보자.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고조선의 수도를 오늘날의 한반도 평양에 비정하였다.
→ 남한에서 고조선의 수도를 한반도 평양에 비정하는 사람은 식민사학자다.
이 역시 우습지도 않은 이야긴데, 왜냐하면 고조선의 수도를 한반도 평양에 비정하는 주장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 의해서도 제기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식민사학이 존재하지도 않던 시절의 사람들에게 식민사학자라는 낙인을 찍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물음은 집어치우고,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지 근본적인 이유를 생각해보자. 그것은 바로, ‘고조선의 수도를 평양에 비정하는 것’과 ‘식민사학’ 간에는 그 자체의 논리적 상관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의 주장도 마찬가지로 금방 무너진다. ‘고구려를 강조하고 신라를 폄하하는 것’과 ‘좌파적 인식’에는 어떠한 상관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필자가 이러한 내용으로써 비판했더니, 이제는 이런 반론이 들어온다.
좌익 인사가 고구려를 강조하고 신라를 폄하하면, 이는 북한의 정통성 논리에 힘을 실어준다는 의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
(...)
일단 ‘좌익 = 북한’이라는 인식도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는 차치하자. 필자는 어떻게 저런 결론이 도출될 수 있는지, 참으로 의아스럽다. 그렇다면 친일파 춘원 이광수가 남긴 문학작품들을 전부 친일문학이라고 무시해버릴 것인가? 물론 그 가운데에는 친일적 성향을 가진 문학작품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친일행적을 했다는 것과, 문학작품 하나를 남긴 것은 일단은 별개의 문제로 봐야 할 일이다.
마찬가지다. 한 인물이 좌익 활동을 한다는 것과, 고구려를 강조하고 신라를 폄하하는 고대사 인식 간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절대적 근거는 없다. 정말 그가 북한의 주장을 답습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그가 쓴 글을 직접 읽어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이것은 필자가 예전에 금성교과서의 좌편향 여부는 교과서를 직접 읽어보고 판단해야한다는 요지와 일맥상통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근대 민족주의 사학의 주장을 답습해서 그런 고대사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북한의 주장을 답습한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관심법으로?
반대로, 북한에서 신라를 강조하는 사람이 반동세력이라는 비난을 받게 된다면 이것도 이해해줘야 하는 것인가?
필자가 이 포스트의 제목에 ‘일부 한국인의 의식 수준’이라고 썼지만, 과연 이 일부가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인터넷 뉴스 기사의 네티즌 평란을 읽어보면 이렇듯 비논리적인 인식들이 너무나 곧잘 눈에 띤다. 한국에 좌파, 친북 세력들이 실제 얼마나 존재하는지를 두려워하기보다는 사람들을 무조건적으로 잠재적 친북 세력으로 규정하는 당신들의 인식을 먼저 두려워해야하지 않는가? 지금은 반공독재정권 시절이 아니다. 반공독재정권이 남겨놓은 트라우마가 얼마나 큰지, 다시금 절감하게 된다.
한국전쟁 등으로 좌익인사들에게 당한 원한이 있고 이를 이해해야한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비논리적으로 타인을 비난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만약 그런다면, 결국 해방정국이나 독재정권 시절의 맹목적인 난투극상을 계속 재현하게 될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남북한의 냉전세력들이 원하는 진정한 파시즘의 시작임을 기억하라.
p.s 본문의 요지가 아니라서 쓰지 못한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남한 사회에서 ‘고구려를 강조하고 신라를 폄하하는 인식’은 대체적으로 근대 민족주의 사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필자는 이런 인식은 지나치게 근대 민족주의적 인식이라는 색안경으로 역사를 바라본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조금 다르게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레포트 작성중이라 시간이 널널하지는 않지만, 이런 현실이 너무나 답답해서 1시간가량을 이 글 쓰는 데 투자한다. 잘못된 인식을 가져왔던 분들은 이 글을 읽고 곰곰이 생각해보시기 바란다.